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단편17

⌜모자⌟ ⌜모자⌟ 저자 : 강경애 백일 기침에 신음하는 승호를 업고 친가를 나선다. 딸자식이니 몇 달은 보아주겠거니 했지만 남보다 못하지 않음을 깨달았다. 이제야말로 원수같이 지내던 시형네 집에 머리숙여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. 조카 자식도 자식이지. 오냐 가자! 이렇게 바람이 차고 눈 오는 날에 밖에 오래 있는 것이 승호에게 해롭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렇게 망설이며 가슴을 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. “승호야, 너 큰아버지 앞에서 기침을 참아야 한다. 그래야 한다.” 자는 듯이 엎드려 있는 승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렇게 애원하다시피 하였다. 그는 멈칫 섰다. 시형네 문이 눈에 선듯 띄었던 것이다. 그리고 새로 페인트칠을 한 시형네 대문은 그가 오래간만에 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그는 뛰는 .. 2021. 10. 30.
⌜마약⌟ ⌜마약⌟ 저자 : 강경애 ‘대체 이 산골로 뭘 하러 들어올까, 왜 그리 보득일 재워 눕히라 성화였나, 이리 멀리 올 줄을 짐작했다면 꼭 업고 올 것을. 또 한 번 물어봐.’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는 남편을 따라 나섰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. ‘날 죽이고 그가 죽으려고 이리 오나.’ 소름이 오싹 끼친다. 하지만 이내 마음을 잡는다. ‘저기 누구를 찾아가는 게지. 그래서 쌀 말이나 얻어 오려고 날 데리고 오는 게지.’ 한참 후에 이리 오는 신발소리가 있으므로 달려나왔다. “보득이가 깨었어요.” 목이 메어 중얼거리고 보니 뜻밖에 중국인만이 아니냐. 겁결에 발을 세우고, “여보!” 진서방 뒤를 살피니 있으려니 한 남편은 없고 어둠이 충충할 뿐이다. 머리끝이 쭈뼛해진다. 단박에 진서방은 그의 손을 덥석 쥐.. 2021. 8. 20.
⌜검둥이⌟ ⌜검둥이⌟ 저자 : 강경애 교실 문으로 검정개 한 마리가 덥씬 들어와 K선생을 향해 꼬리를 치며 달려온다. K선생은 반가운 마음이 있었으나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. 하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온다. ‘아차 내가 또 감정적 행동을 했나 보구나!’ “그만둬요,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뭘 주어서 자꾸만 개가 간다고 저번 교장댁이 좋지 않은 기색을 하던데요.” 아내는 키승키승 보채는 경선이를 떨쳐 업으면서 말하였다. 어깨너머로 보이는 경선의 넓은 이마는 아내의 것을 똑 땄다고 본다. “늘 오니까, 그럴는지도 모르지. 그러나 오늘만은 줘야겠어. 아까 이놈이 교실에 들어왔단 말야. 그런 걸 막 때려줬지.” - 책 속에서 [판매처] 교보문고 | 알라딘 | 예스24 2021. 8. 20.
⌜날개⌟ ⌜날개⌟ 저자 : 이상 아내는 하루에 두 번 세수를 한다. 나는 하루 한 번도 세수를 하지 않는다. 나는 밤중 세 시나 네 시쯤 해서 변소에 갔다. 달이 밝은 밤에는 한참씩 마당에 우두커니 섰다가 들어오곤 한다. 그러니까 나는 이 18 가구의 아무와도 얼굴이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. 그러면서도 나는 이 18 가구의 젊은 여인네 얼굴들을 거반 다 기억하고 있었다. 그들은 하나같이 내 아내만 못하였다. 열한 시쯤 해서 하는 아내의 첫 번 세수는 좀 간단하다. 그러나 저녁 일곱 시쯤 해서 하는 두 번째 세수는 손이 많이 간다. 아내는 낮에보다도 밤에 더 좋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. 그리고 낮에도 외출하고 밤에도 외출하였다.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.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.. 2021. 7. 15.